초록 칠판
이제 제 문제를 말씀드렸으니, 선생님의 답을 듣고 싶습니다.
어딘가가 아파서 내과 의원을 찾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가능한한 짧은 시간내에 환자인 나의 상태를 전달하고
이어지는 의사선생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처방전을 들고 그 방을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진료는 이뤄졌습니다.
저를 찾는 내담자분들이
이러한 기대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내담자분이 스스로 생각한 자신의 역할에 따라서 시간을 아껴가며
많은 이야기들을 퍼내듯이 쏟아놓고,
상담자인 저는 이 이야기를 감당하고 따라가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 저의 머리 속에서는 파란 불 대신에 빨간 불이 켜집니다.
내담자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모두 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텐데,
그 때가 되면 이제 저에게 뭔가 큰 해결책, 뭔가 뾰족한 처방을
기대하거나 요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중 일부는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왜 빨간 불이라고 할까?' 의아해 하실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의사선생님과 달리, 상담선생은 이미 만들어진 최상의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문적 배경과 임상적 경험에 따라서 어느정도의 방향성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최상의 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전문가라고 한다면 모름지기 척하고 척한면서 알아듣고,
내담자 스스로가 살피지 못하는 부분까지 간파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상담의 원리과 실제에 비춰볼 때 다소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전문적 상담자는 오히려 자신의 이러한 직관을 잠깐 옆으로 치워놓으려고 합니다.
내담자분이 왜 힘들어 하는지에 대해, 쉬운 말로 감(感)이 스치더라도 이를 덥썩 믿지는 않고,
여러 가능성중 하나로 대우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잠정적 답안이 사실일수도 있지만(나중에 보면 간혹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담자분이 이를 수긍하고 온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담 선생이 번뜩이는 전문성으로 간파한 무엇이
내담자분에게 진정한 위로와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곤 합니다.
그래서 상담자가 자신의 머리 속에서 그린 그림이 최상의 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최상의 답은
상담선생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고 상담자의 입을 통해 표현되기보다는
그 반대로 내담자의 머릿속에서 구상되고 역시 내담자의 입을 통해 언어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담자의 고통을 견딜만하게 완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키는 무엇은
상담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으며
내담자와 상담자의 협력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 형태가 잡혀가는 경향이 있고,
바람직하게는 상담 속에서 내담자의 손에 의해서 직접 일구어집니다.
내담자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붓듣이 하고 있을 때,
저의 머릿속에 켜진 빨간불은 저로 하여금 일방적인 소통이
느낌이 있는 양방향적인 소통으로 바뀔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 저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최상의 답은
상담 선생인 저의 전문적 지식 속에 있는, 어떤 기성품같은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상담속에서 체험하는 과정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독특한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항상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 내담자분은 저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이제 제가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제 전문가인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이 경우, 제가 위에 적은 구구절절한 설명을 여러분께 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때론 말을 좀 더듬는다고 해도
변명처럼 듣지는 말아주십시오.
- 황성훈
우리는 진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가능한한 짧은 시간내에 환자인 나의 상태를 전달하고
이어지는 의사선생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처방전을 들고 그 방을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진료는 이뤄졌습니다.
저를 찾는 내담자분들이
이러한 기대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내담자분이 스스로 생각한 자신의 역할에 따라서 시간을 아껴가며
많은 이야기들을 퍼내듯이 쏟아놓고,
상담자인 저는 이 이야기를 감당하고 따라가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 저의 머리 속에서는 파란 불 대신에 빨간 불이 켜집니다.
내담자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모두 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텐데,
그 때가 되면 이제 저에게 뭔가 큰 해결책, 뭔가 뾰족한 처방을
기대하거나 요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중 일부는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왜 빨간 불이라고 할까?' 의아해 하실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의사선생님과 달리, 상담선생은 이미 만들어진 최상의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문적 배경과 임상적 경험에 따라서 어느정도의 방향성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최상의 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전문가라고 한다면 모름지기 척하고 척한면서 알아듣고,
내담자 스스로가 살피지 못하는 부분까지 간파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상담의 원리과 실제에 비춰볼 때 다소 비현실적인 것입니다.
전문적 상담자는 오히려 자신의 이러한 직관을 잠깐 옆으로 치워놓으려고 합니다.
내담자분이 왜 힘들어 하는지에 대해, 쉬운 말로 감(感)이 스치더라도 이를 덥썩 믿지는 않고,
여러 가능성중 하나로 대우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잠정적 답안이 사실일수도 있지만(나중에 보면 간혹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담자분이 이를 수긍하고 온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담 선생이 번뜩이는 전문성으로 간파한 무엇이
내담자분에게 진정한 위로와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곤 합니다.
그래서 상담자가 자신의 머리 속에서 그린 그림이 최상의 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최상의 답은
상담선생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고 상담자의 입을 통해 표현되기보다는
그 반대로 내담자의 머릿속에서 구상되고 역시 내담자의 입을 통해 언어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담자의 고통을 견딜만하게 완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키는 무엇은
상담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으며
내담자와 상담자의 협력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 형태가 잡혀가는 경향이 있고,
바람직하게는 상담 속에서 내담자의 손에 의해서 직접 일구어집니다.
내담자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붓듣이 하고 있을 때,
저의 머릿속에 켜진 빨간불은 저로 하여금 일방적인 소통이
느낌이 있는 양방향적인 소통으로 바뀔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 저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최상의 답은
상담 선생인 저의 전문적 지식 속에 있는, 어떤 기성품같은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상담속에서 체험하는 과정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독특한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항상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 내담자분은 저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이제 제가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제 전문가인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이 경우, 제가 위에 적은 구구절절한 설명을 여러분께 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때론 말을 좀 더듬는다고 해도
변명처럼 듣지는 말아주십시오.
- 황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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